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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 05.12 ・ Contains spoilers

2025.05.12 (Mon)
항상 여름 싫다!“ 고만 말했었는데, 생각을 달리 보면 나는 여름을 네 번째로 사랑하는 것이다.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으므로. 지독한 햇볕과 숨이 막히는 습도, 끈적한 땀, 냄새, 그것들을 찾아 모여든 벌레들까지도.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좋아지게 될지도.
존재 말고 존재의 그림자를 더듬은 흔적. ... 절멸하고도 남은 선. 8월은 내게 그런 선이다. 그런 선을 꼭 쥐고 잠을 자고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다. 작은 더위와 큰 더위를 지나 잔서, 한풀 수그러든 열렬과 열심, 피로를 견디는 어떤 얼굴 어떤 지경으로 꾸려진 낮밤들. 이제 없는 것들의 기원에 골몰하고, 오로지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미래를 기다리는 하루하루.
시간이 새로 열리고, 공간이 새로 펼쳐진다. 그렇게 단단한 시작만을 밟아가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참, 세상에는 물컹한 끝도 있었지 그걸 처음 안 사람들처럼 소스라친다. 끝은 미래라서 반드시 눈앞에 도착하고, 언젠가는 현재가 되고. 그 순간 무엇을 할 수 있나. 무엇도 할 수 없다. 대개는 울면서 끝을 밟고 각자 다른 길로 간다. 그것을 이별이라 부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별하지 않는다. 끝을 넘어서지 않고 스스로가 끝이 되어버린다. 따로 살아갈 미래가 다가오지 않도록 당장 시간을 끊어낸다. 그렇다면 사랑은 거기에서 끝났다고 해야 하나 끝없는 곳으로 갔다고 해야 하나.
끝은 정말 끝일까. 끝은 사람들의 운명을 스쳐 어딘가로 계속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노래에 업혀서 죽음 비슷한 잠에 업혀서. 도무지 끝을 모르는 끝은, 끝없음을 향해서.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꽃의 둘레가 바짝 탔더라. 꽃잎을 한껏 말고 빈틈없이 새카맣게 되어버린 것도 있더라. 소신하듯, 여름에 공양하듯. 여름꽃이라고 해서 여름이 수월하지는 않은 것이지.
기도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놓을 테니까, 도우시든가요.
늘 그랬듯, 내가 구했다고 여긴 것은 실은 나를 구한 것이었다.
냄새를 맡지 못하자, 대신 냄새를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분명 그 냄새를 알고 있는데도 머릿속에 전혀 떠올려지지 않았다. 작은 기억의 꼬리 같은 것이 솟아나자마자 사라졌다. 당혹스러웠다. 나와 세상 사이에 불투명한 막이 느껴져서 숨이 막혔다. 그제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내가 잃은 것은 후각만이 아니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기억은 그토록 후각에 빚지고 있었다.
냄새로 알아본다는 말. 냄새가 없으면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어서, 냄새가 없으면 기꺼이 잃을 수 있다는 뜻이어서.
우산을 잃어버리기 좋은 날들이다. 비가 무시로 오가기에. 낯선 곳으로 뜨고 싶었던 사람들이 우산으로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허공을 짚으며 언제나 이방異邦의 기분으로 살아가기. 멀찍이 가서 돌아오지 못하기. 비처럼 흘러가버리기.
그것은 ‘자신에게 머무르는 것, 스스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만족이나 해답이 바깥에 있다는 착각을 이겨내라고. 모자라는 자신 안에서 사랑으로 인내하고 머무르라고. 그것이 정주라고.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인연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희망 없이, 언제까지 기다린다는 기약 없이, 눈을 감고 기다릴 것이다. 바람일까, 당신일까, 시일까, 슬픔일까, 혹은 그것들이 모두 하나일까 맞춰보면서. 그러다 ‘그것’이 나를 다시 지나치는 때가 온다면, 내가 기다려온 것이 ‘그것’임을 알아챌 수 있기를. 가벼이 일어서 그 뒤를 따라 조용히 걸을 수 있기를. 시절 인연처럼 계절이 열렸고, 이제 닫히려 한다. 나는 문밖으로 드르륵 나가야 한다. 더 쓸쓸한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여름아, 여름의 모든 인연아, 너는 여기에서 멈추어라.